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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인식()   2005-8-3  
  [Panas(뜨거운) 편지 17]

Panas(뜨거운) 편지 17

중연, 현당, 연제, 예림, 소해, 목양. 구산, 구은, 화정,
상연, 해암, 담산, 다화, 필당, 송하, 청하, 문경, 금석 님께

푸대접 받는 한국인의 이름
이름은 존재의 시작이자 의미이다. 사람의 경우 출생과 더불어 가장 관심의 대상이 되는 것이 이름이라 할 수 있으며, 언어생활의 시작이 곧 이름이다. 특히 우리 민족은 전통적으로 이름을 존중(敬命思想)하는 풍속이 강했다. 일제하의 창씨개명을 인류역사상 가장 혹독한 문화적 범죄라고 규정하는 것이나, 입신양명(立身揚名)에 담긴 의미, 이름에 관련된 속담 몇 가지만 새겨보더라도 우리 민족에게 이름이 얼마나 절대성을 지니는지 짐작되고도 남는다. 이런 까닭에 아명(兒名), 자(字), 택호(宅號), 예명(藝名), 필명(筆名), 아호(雅號), 시호(諡號) 등 호칭의 다양함이 어쩌면 당연한 것이라 하겠다.

그 한국인들의 이름이 푸대접을 받고 있다. 때론 이름을 목숨처럼 중시 여기는 민족의 이름이 타국의 국제사회에서 제 역할을 못하고 있다. 대부분의 이름들이 외국인이 발음하기 어렵고, 이름을 부르는 것이 일상화된 외국인들에 비해, 자기의 이름이 아무에게서나 함부로 불리는 것을 원치 않는 한국인들의 정서, Mr 김, Mr 박, Mrs 리, Miss 최 등 성씨만 밝히는 경우 등이 뒤섞여 소중한 이름들이 엉뚱하게 푸대접을 받고 있는 것이다. 외국인들이 많은 현장에서는 쉽게 웃어넘기지 못할 일이 일어나기도 한다. 성만으로는 이미지가 불분명하게 전달되므로 땅딸이 누구, 뚱뚱한 누구, 대머리 누구 등 신체적 특징 따위를 붙여 부르는 경우가 비일비재로 생기는 것이다. 더러는 성씨를 이름으로 착각하여 “한국인은 왜 그렇게 같은 이름이 많은가?”라는 질문을 한다고도 한다. 종족에 따라 유난히 같거나 비슷한 이름이 많고, 태어난 요일을 본떠 대강 이름을 짓는 것과 같은 미개적 현상으로 이해되는 측면도 있는 것 같아, 한국인의 정체성에 대한 심각한 훼손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는 필자의 눈에 비친 인니의 정황이지만 다른 국제사회도 만만치 않을 것임은 예상하기 어렵지 않다.

이는 중국계 화교들이나 일본인들은 겪지 않는 혼란이다. 호적상의 이름이 알파벳권의 사람들이 부르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어렸을 때부터 자연스럽게 서양식 이름을 따로 사용함으로 자타간 거부감을 줄이는 것이 중국계들이고, 알파벳으로 전환을 해도 발음이 난해하지 않은 것이 일본인들 이름이기 때문이다.

물론 외국에 살고 있기 때문에 어쩔 수없이 정서적 동화를 위해 알렉스, 제임스, 토머스 등 서양식 이름을 지어 사용하고 명함에 그렇게 새겨 넣은 한국인들도 많다. 문제는 그 이름을 사용하면서도 왠지 서양인들 앞에서는 주눅이 들고, 한국인들끼리는 감추고 싶어 한다는 점이다. 근거가 미약한 이름을 지어 사용하려니 스스로의 마음에 와 닿지 않아 자주 바꾸기도 하지만 그나마 한국인들끼리도 겹치는 경우가 많은 것이 현실이다. 궁여지책으로 영문이니셜만 사용하는 사람도 많은데 이 또한 외국인에게나 본인에게도 늘 만족스럽지 못한 이름임에는 위와 다를 바 없다.

이름은 다른 사람과 나를 구분하는 강렬한 수단이다. 그것은 예나 지금, 국내나 국제사회에서도 불변이다. 그러므로 이름이란 누구나 부르기 쉽고 기억하기 쉬우며 심적으로도 자긍심을 가질 수 있는 것이어야 함은 당연하다. 그러나 위에서 살펴본바와 같이 한국인들의 이름이 발음의 난해함으로 인해 본질을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자랑스럽고 고유한 우리 문화와 언어를 탓할 일은 절대 아니다. 호칭에 대해 아무런 문제성을 느끼지 않고 살아가는 한국인도 있고 발음상의 문제점을 능숙한 언어 실력으로 충분히 이해시키면서 살아가는 한국인이 없는 것도 아니다. 어쨌든 한국인의 풀 내임을 외국인이 정확한 발음으로 호칭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고, 여전히 애 어른 할 것 없이 덜렁 이름만 부르는 것을 한국인으로서는 수용하기 쉽지 않다. 그러나 외국인들과 부대끼면서 문화 경제적으로 화합하고 경쟁해나가야 하는 환경에서, 이름을 부르면서 친밀해지는 외국인들의 정서를 마냥 무시만 할 수 일이기도 하다. 묘리를 찾아야 하겠다.

필자는 그 묘리를 바로 아호(雅號)가 지니고 있다고 본다. 아호란 해석 그대로 ‘고상하게 부르는 호칭’을 의미한다. 추사나 퇴계, 다산처럼 이름보다 아호가 더 고유명사가 된 경우도 많다. 아호란 전통적으로 존칭을 추가하지 않아도 결례가 아니다. 처음부터 고상함, 격조, 아취 등의 의미로 지어지고 불려지기 때문이다. 부르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 모두가 정겹고 운치의 시어적 호칭인 것이다. 아호란 일부 사람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우리의 선조들이 전통적으로 사용해왔듯 현대라고 해서 사용하지 못할 이유가 하나도 없다. 시대 상황에 의해 우리의 아까운 전통들이 얼마나 많이 버려지고 잊혀지는가. 지나고 나면 더러 아쉬운 것들이 많지 않는가. 물론 일부 특정인들이 변함없이 아호를 활용하고 있음은 참 다행이다. 최근에는 정치인 고건 씨가 자기의 정치 철학을 담은 ‘우민(又民)’이란 아호를 지어 공개함으로써 아호에 대한 새로운 환기가 일기도 했다.

문헌을 살펴보면 역사적으로 아호는 대부분 자기가 태어난 곳이나 사는 고장, 산천의 이름을 참고(所處以號,)하거나, 뜻하고 바라는 바를 내함(所志以號)하고 있다. 또 자기가 우연히 처한 환경을 대변하여 지은 경우(所遇以號)도 많다. 그러므로 바로 이 아호가 외국인과 섞여 사는 한국인의 이름에 엉킨 실타래를 푸는 대안이 될 수 있다. 현실적으로 아명(雅名)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라면 너무나도 당연하거니와, 세상 경험 걸러낸 아취의 아호 하나 소유하는 것도 타국에 사는 이들의 삶에 여유 한 줌을 얹는 것이 아니겠는가. 내 외국인 누구나 쉽게 호칭하거나 기억하기 쉽고 의미도 있는 아호를 지어 당당히 사용해보자. 전문가나 윗사람에게 받는 것이 좋다고 여기는 정서가 대부분이지만, 가족이나 친구끼리 지어 주고받거나 스스로 자호를 하는 것 또한 전통이다. 이럭저럭 활용하다보면 결코 오랫동안 사용해온 이름에 뒤지지 않는 애정과 가치로 다가갈 것이다. 한인들의 아호가 세계 곳곳에서 드날리기를 기대해 본다.

* 금방 마친 따끈한 원고이기에 앞에 붙여 보았습니다. 공감하십니까?

전 요즘 공부에는 왕도가 없다는 진리를 새삼 깨닫고 있습니다. 타국생활 2년이 넘어서야 현실을 깨달은 셈이랄까요? 떠나오기 전 담산 어른 소개로 사온 영어교재를 요즈음 들어서야 꺼내어 열심히 들여다보면서, “그저 옆에 영어를 잘 하는 사람들이 사는 사회에 살면 뭐하나 내가 해야지” 입니다. 공부란 그저 스스로 열심히 하는 수밖에 없다는 것을 나만 몰랐을까요? 아무리 좋은 선생이 곁에 있어도 결국은 스스로 얻고 쌓아야 한다는 것을 저만 몰랐던 것 같습니다.

지난 2월에 제가 한국에 갔을 때 이제 그만 놀고 공부를 해야겠다고 간절히 이야기하는 분들이 있었습니다. 목연 최경애선생과 금정 박종숙선생입니다. 놀아도 마음이 편하지 않고 해서 붓을 열심히 잡아야겠는데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에 알맞은 공부 방법을 찾아주어야 하겠는데 돌아와서 몇 달을 생각해도 썩 마땅한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퍼뜩 스치는 것이 있었습니다. 어디 다른 선생을 찾아가는 것도 싫다고 하고 그나마 저는 멀리 있으니 공부를 하는 방법은 늘 제가 말씀드린 데로 혼자 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안한 것이 <작품을 목적으로 서예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작품전을 해보는 것은 그야말로 참 공부다.>였습니다. 드디어 제가 어머니 전을 했던 인사동의 라메르 겔러리로 계약을 했고, 이를 위한 전반적인 틀을 잡기 위해 오는 7월 22일 두 사람이 자카르타를 방문한답니다. 모든 것 다 잠시 미뤄두고 떠나와서 집중적으로 전체적인 작품구상을 해보려는 시도지요. 지난 달 빠나스 통신 16편에서 다음 달에는 제가 제안을 하나 드리겠습니다. 하고 운을 떼었던 것을 단도직입으로 말씀을 드리자면 이처럼 삼삼오오 전시회를 계획해보시라는 것입니다.

물론 이미 구은어른과 화정, 담산어른께서는 7순전을 합동으로 하지지 않겠나 하는 생각은 암묵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아니 제가 멀리 있지만 반드시 하시게 하고 싶습니다.
또한 목양여사님, 필당여사님도 계획해보실 때라는 생각이고, 중연, 현당, 연제여사께서도 이제 그 정도 오랜 교분이면 뭐 열매하나 맺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예림선생께서는 당연히 개인전을 하셔야 합니다. 아니면 짝을 지워드릴까요?
구산장께서는 아마 졸업논문전을 하셔야하지요? 소해어른의 전시는 지역의 어른으로서 좋은 모습이 되실 것이고,
금석도반은 그 반듯한 면모를 서예로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주는 것이지요.
송하, 청하께서는 이미 그룹이 많으시니... 그러나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합니다.
참 해암 장군께서는 쾌차하셨지요?
상연어른, 다화선생께서는 아직도 심중서(心中書)만 하시나요?
문경은 아직 연락이 없습니까?
뭐 이제 구구절절 밝히지 않아도 그저 스스로 한 맺음 해볼 필요가 있다는 것을 다 아시잖습니까? 이젠 모든 분들이 제가 도와드리지 않아도 되실 것으로 압니다만, 그렇다고 언제라도 저를 필요로 하시면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 하겠습니다.

제가 멀리 있으니 오히려 한국서단이 더 잘 보입니다. 속내를 편안히 털어놓는 사람도 많고요. 뭔 속인지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정말 잘 떨어져 있다는 말도 듣습니다. 이런 산만한 정황일수록 그저 담담히 자기가 최선을 다한 모습을 내보인다는 것은 본인에게도 또 가족을 비롯한 주변의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도 매우 기쁜 일이 될 것입니다. 힘들인 대가로 자신과 주변이 조금이라도 보람을 느끼고 행복해진다면 해볼만 한 일 아닐까요?

어떤 신부님이 강론 중에 “마음의 힘은 남에 눈치 볼 것 없이 개구쟁이처럼 살 때 키워 진다” 고 하시더군요. “신경증이란 병도 성질 더러운 사람들에게는 걸리지 않고 착하고 고지식하게 남에게 싫은 소리 한 마디 못하는 사람에게만 걸린다”고 합니다.

멀리서 그저 한가하게 건너다보며 불이 켜지길 기다리는 이 순간을 있게 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저 또한 오늘도 변함없이 최선을 다해 이런 저런 일들로 시간을 쌓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2005년 7월 6일 자카르타 슬라딴에서
손인식 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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