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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인식()   2005-8-3  
  [Panas(뜨거운) 편지 18]

Panas(뜨거운) 편지 18

중연, 현당, 연제, 예림, 소해, 목양. 구산, 구은, 화정,
상연, 해암, 담산, 다화, 필당, 송하, 청하, 문경, 금석 님께

받는 분들의 명단에서 해암장군님 아호를 지우지 못했습니다. 설사 누군가 연락이 두절되거나 모임에 나오시지 않는다고 해도 받는 분의 이름을 지우고 싶지 않은 것이 이 빠나스 편지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참 안타깝지만 나중엔 지울 수밖에 없겠지요?
해암장군께서 서거하셨다는 소식을 화정어른께서 전해주신 그날 저는 점심을 먹기 전 함께 식사를 하는 사람들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묵념을 제안하여 멀리서나마 잠시 고인의 명복을 빌었습니다만, 참으로 생각할수록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천상에서도 예의 그 마음씨 좋은 아저씨의 너털웃음을 날리며 더러는 서예를 즐기실 것이라 믿습니다. 이젠 문장군님의 유작들이 되어버린 한얼묵연 도록속의 작품들이 참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가운데 그것으로나마 고인의 체취를 기릴 수 있음이 또한 다행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어떻습니까? 다시 한 번 고인의 명복을 비는 기도로 점심 식사를 시작하시는 것이….

모든 것을 두고 훌훌 떠나는 분이 있어 사람의 마음을 안타깝게 하는가 하면, 사는 동안 또 하나의 업적을 쌓아 올리시어 주변을 감동스럽게 하는 분이 있어 기쁘게도 하는군요. 소해어른! 중부서예대전 초대작가에 오르신 것 정말 축하드립니다. 공모전이 공부를 하기 위한 수단임에 틀림이 없는 것이지만, 그렇게 외적으로 증명을 받는다는 것은 분명 쉽지 않은 하나의 결과입니다. 다 짧지 않은 세월동안 꾸준하면서도 간절하게 노력하신 덕분이라 생각합니다. 소해어른께서는 워낙 세상사에 관심을 줄이시고 노력하는 분이셨기에 이룰 수 있는 성과였을 것입니다.

세삼 풍광 좋은 남한산성의 학교에서 처음 뵈었던 때의 생각이 새롭습니다. 그때가 벌써 언제입니까? 그때 함께 붓을 잡던 누구도 지금까지 계속하지 못했고 초대작가의 반열에는 더욱 오르지 못했잖습니까? 세월이 그만큼 묵었기에 좋은 소식이 더욱 반가운가 봅니다. 정말 감사한 일입니다. 지난 달 편지에 전시회를 해 보시라고 했는데 정말 다시 한 번 고려해 보시지요. 광주가 떠들썩하게 말입니다. 자! 제가 술을 한 잔 올리겠습니다. 못하시는 약주지만 한 잔 받으시고 덕분에 모이신 모든 분들과 함께 건배를 하시지요. 옆에 함께 계신 분들께서 마음으로 축하해주시리라 믿습니다만, 제가 따르는 술로 건배! 건배!! 건배!!!

<그 아침!! 반둥의 그 아침을 잊을 수가 없다. 행여 잊혀질까 두렵다. 스스로를 태우기 위해 붉고 마알갛게, 선하게 선하게 내리던 겹도록 청순한 햇살, 그 빛이 있어 다시 삶의 환희를 밀어 올리는 초록의 생명들이 장엄하게 조우하던 반둥의 그 아침, 그 순간을 두고두고 기억하여 이야기하고 싶다.

전날 찌위데위와 빠뜽안 지역의 선경에 파묻혔던 때문일까. 선녀가 내린다는 그 곳, 산이 병풍같이 둘려 있던 그 곳, 화산재 속에서 모질게 자라 잎 더욱 푸르고 야무지던 숲 사이로 아주 천천히 신비스럽게 열리던 하얀 선경의 호수 까와뿌띠! 화산수가 끊어 오르는 호수 주변엔 눈이 덮이고 물낯은 얼음으로 덮인 것 같던 그 곳, 바로 그곳에 마음 내려놓고 온 탓일까. 아니면 결곱게 우러난 차 맛보다 더한 여운으로 가슴에 콱 박혀버린 차밭, 비와 운무가 감아들던 광활함의 끝을 모르겠는 차밭, 못내 가슴 울컥하게 하던 차밭의 정취 때문일까.

아무튼 그 아침 유난히 장엄한 자연교향악이 거기 있었고, 필자는 불붙지 못한 담배와 사그라진 성냥까치를 손에 든 채 호텔의 테라스에서 그렇게 멍히 한참을 반둥의 아침에 감전 당하고 말았다.

떠나라! 있던 곳을 두고 떠나라!! 어딘가 새롭게 마주하는 곳에는 오랜 기다림이 알차게 영글어놓은 문화가 있느니라. 그 새로운 문화를 찾아 떠나라. 가끔 일상이 무료하기도 한가. 현재의 삶이 늘 그저 그렇다고 느껴지는가. 있던 곳을 잠시 벗어나보라. 돌아올 곳을 두고 떠나는 설렘을 아는가. 다시 돌아올 곳이 있어 마음 넉넉해지는 옹골짐을 아는가. 떠남으로 자기의 삶이 그리워지게 하라. 그러기에 가지고 떠나지 말고 모두 남겨두고 떠나라. 그리고 다가올 새로운 것들을 경이의 놀란 눈으로만 보지 말고 조용히 아주 조용히 마음으로 느껴보라. 여행은 가는 곳마다, 발길이 닿는 곳마다 거기 존재하는 것들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살면서 쌓였던 마음 무겁게 하는 것들을 통째로 내려놓고 오는 것이니….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천길 심연의 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호텔 옆을 깎아질러 아득하게 내려 꽂힌 계곡에서 들려오는 낮고 낮은 지혜의 순례자 물의 가르침이었을까. 계곡을 사이에 두고 가로누운 작은 등성이에 군락을 이루어 핀 노오란 꽃들이 햇살바라기 하며 터치는 소리였을까. 아래로는 도시의 야경, 위로는 다감한 별빛 사이에서 풍정을 자랑하던 유럽풍 카페가 어제 밤의 정을 못 잊어 다시오라는 먼 손짓이었을까. 그랬다. 반둥이 말하고 있었다. 숲에 묻혀 고요하고 움직임이 없는 것 같았던 도시, 그러나 숲으로 가려지고 덮인 길, 그 길 위로 쉼 없이 오가는 차량들과 사람들 그리고 반둥의 자연과 문화가 어우러져 삶의 진실을 그렇게 시각으로 들려주고 있었다.>

위의 글은 다음 월요일 여기 신문에 실릴 글 중에 서두입니다. 한인회 문화탐방반이 있는데 그에 대한 글을 쓰기 위한 핑계 삼아 저도 가고 싶은 고장을 동행했던 것입니다. 어디에나 아침햇살은 순정하고 이슬과 햇살을 머금은 지상의 풀들은 아름다울 것이나 이른 아침 호텔의 테라스에서 내려다본 인도네시아 제3의 도시 반둥의 외곽은 정말 새로운 발견이었습니다. 700~1200의 고지인데다가, 년 중 내내 17~22를 오르내리는 기온에 유장한 산천을 지닌 곳이니 그럴 만도 하지요.

삶의 틈새에서 더러 새로운 발견이 일어난다면 그 삶은 행복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새로운 발견이 작은 깨우침이라도 된다면 또한 이 어찌 환희와 희망이 아니겠습니까? 언제 지났나 싶은 열흘 동안, 여름처럼 왔던 목연, 금정선생은 아직 여름이 한창인데 가을처럼 훌쩍 떠나고 남은 빈 방과 같이 횅한 마음이 되어 일상을 지키고 있습니다. 두 분의 전시회 준비가 삶의 틈새에서 틀림없이 새로운 발견일 것임을 믿으면서 여러분께서도 진심으로 멋진 결과를 맺을 수 있도록 기도해주시고 격려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누구라도 새로운 발견을 위해 도전하시기 바랍니다. 목적을 정하고 나아가다 보면 틀림없이 환희와 희망을 느끼게 하는 고난과 새로운 발견들이 일어날 것입니다.

유난히 더운 날씨와 비 등 여름다운 여름이 계속된다지요? 그 가운데도 모두 굳건하시지요? 마음에 평화를 소유하신 분들이니 여일하시리라 믿습니다. 날이 저물어 지면서 목연, 금정선생께서 기다리다 기다리다가 건기라서 결국 접하지 못한 줄기 굵은 비가 아쉬움으로 쏟아지고 있습니다. 갈길 바쁜 새들이 급히 나는데 세상의 묘미일까요?
조금은 서늘해진 9월에 뵐 것을 약속드리면서 빠나스 통신 18편을 마칩니다.
감사합니다.

2005년 8월 3일
자카르타 슬라딴에서 손인식 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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