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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인식(서예가, 서예로닷컴대표이사)     
  [새김질의 詩적 美學 - 현봉 최수일전 현대 서각전]

성큼 다가왔던 현대서각

기록을 위한 새김은 필연이었다. 이 필연의 새김질은 오늘날 각종 예술의 근원과 실제가 되고 있어서, 새김질이 인류문명과 함께 하는 떼려야 땔 수 없는 절대적인 것임을 증명하고 있다. 1989년 작지 않은 파장을 일으키면서 등장한 현대서각 또한 새김의 연계요 변천이며 발전의 한 면모였다. 문자를 새기는 일이야 인류의 문자역사와 함께 이어져 온 것이니 현대서각의 새김질이라 해서 새삼스러울 것이 없었겠으나, 현대서각은 그 태동부터 전통적 새김질을 뛰어 넘어 새로운 장르의 예술을 창출한다는 자부심으로 야심찬 시도(이현춘, 유장식, 안민관의 3인전)를 했다. “서각이 새로운 서예 장르”로서 “자필 자각으로 창작”하는 “자생적 한국서각”이며 “회화, 조각 등 현대 조형 미학과의 접목”한 것임을 선언하면서 예술화를 꽤했고, 서예와 차별화한 독립 장르로서 서고자 했다.기존의 입체성에다가 공간성, 색채도입, 재료의 다양화와 슬기롭게도 이론적 무장을 함께 시도했다. 이것이 한국서단을 비롯한 전체 예술계의 관심을 끄는 큰 사건은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진보적 서예가들을 밀도 높게 자극한 것만은 사실이다. 쓰인 문자를 얌전히 새겨오던 기능 개념의 서각이 현대서각이라는 이름을 걸고 시도한 순수 예술화가, 서예의 현대성을 부르짖으며 조형적 실험과 표현에 골몰하던 작가들에게 비교적 참고할 만한 변천의 실체로서 다가왔던 것이다.


여기에는 바로 현대서각의 선구로서 관련 협회를 탄생시켰으며 이론 무장과 모든 서각가 작품의 질적 안정을 위해 혼신을 다했던 서울대 조각과 출신의 고 남계 이현춘의 헌신적이고도 집요한 노력이 숨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기도 하다.飢?서각의 모체라 할 수 있는 서예계에서는 그때나 지금이나 전통과 현대서각을 막론하고 긍정과 부정의 시각이 공존한다. 포용과 외면도 교차하고 있다. 서각을 독립 장르로 보아주기를 바라는 것과 관계없이 서예가들은 서예가들대로 서예가 아닌 서각을 서예로 여기지 않고 있는 것이다.이 와중의 현대서각은 그야말로 혼미를 거듭하고 있다. 변화를 위한 변화만을 즐기며 시각적 효과를 지나치게 노리는 등 흥미위주의 유희성이 무성하다. 무원칙한 작품이 남발될 것은 뻔한 일이다. 순수 예술적 전통이 없다는 취약성과 이론기반의 부실, 자각(自覺)을 위한 치열성 부족 등이 근본적인 허점들을 드러나게 한 것이다. 이는 순수예술을 지향하겠다는 본래의 이념과는 분명히 다른 방향이다. 물론 현대서각이 아직도 미 정착의 단계이기 때문에 일어나는 과도기적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안타까운 현상이 바로 다수의 서각가들에 의해 자행되고 있다는 것은 그야말로 이쯤해서 되돌아보아야 함을 의미한다.

새김질의 시적 미학

위와 같은 현대서각의 현실로 인해 전주(2002. 11. 1 - 7)와 부산(11. 8 - 14)에서 열리는 현봉 최수일(玄峰 崔洙日)전은 그 의미가 커진다. 현대서각이 그저 기능이거나 무원칙으로 일관하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작품으로 증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서각을 흥미꺼리 정도로 보는 시각에 무언의 충격파를 발사한다. 더 나아가서 현봉은 여타 장르의 작가들에게 창작세계에 대한 또 하나의 일면을 강력하게 시사해 준다. 한마디로 현봉의 작품에는 진지한 이야기가 많다. 그러나 탁월한 절제로 인해 ‘새김질의 시’ 한 편만 읽게 한다. 이 시적 절제가 작품을 차분하게 음미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작품의 담박(淡泊)함과 현봉에게서 느끼는 순일(純一)함이 뒤섞여 시공을 망각하는 무형의 고단백을 덤으로 안긴다. 서각 작품에서 얻기에는 결코 쉽지 않은 느낌이다. 다분히 필자의 주관적 소감이요 주례사적 안내라 치부한다면 소중한 창작의 실마리 하나를 놓치는 것이 될 것이다. 마음을 비우고 그 느낌을 찾아 구체적으로 다가가 보자.

和平ㆍ40×60cm

첫째, 획의 처리이다. 획을 시작하고 진행하며 거두되 어느 한 곳이라도 서사자의 의식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는 가운데 모필 운용의 묘를 잡힐 듯 살려내고 있다. 이는 서선(書線)의 대소 강약, 생동하는 다양한 선, 문자구성과 함께 서예가로서도 범상치 않은 수준임을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또한 서예작품에서는 표현이 불가능한 기필과 기필이 겹치는 부분과 선과 선이 겹치는 부분의 입체처리도 절묘하다. 이는 평면의 한국화가 석채(石彩)를 이용하여 마티에르나 입체성을 도입하고, 서양화가 동양예술의 번짐을 갈망하는 의미의 실체가 드러난 것이라 하겠다. 이에 더하여 맛깔을 더하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닌 비백의 수치는 ‘절제의 묘란 이런 것’이라는 것을 공감할 수밖에 없게 한다.
둘째, 구성이다. 선과 면, 하나의 면에서 갈려지는가 하면 다시 더해지는 면, 면 위에 면을 형성한 추상형이 창출하는 이미지, 그 이미지가 상승시키는 구성의 다양성과 곡선의 미, 다시 면과 입체, 그리고 입체로부터 무한 공간으로의 이탈 등. 그런가 하면 이 모두를 아우르는 질박한 칼 맛의 바닥과 자연형의 나무판이 있다. “문자를 입체예술로 승화시킨 것이 현대서각”이라는 이현춘의 주장에 절로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이를 올곧게 살려낸 현봉에 의해 현대서각이 균형을 잃지 않겠다는 믿음이 생긴다.

셋째 색채의 사용이다. 사실 색채란 조금만 잘 못 사용되어도 하지 않으니 만 못하다는 느낌을 줄 때가 많다. 선과 면은 물론이고 작품이 주는 이미지를 바꾸기도 하며 무엇보다 단순미가 가져다주는 격조를 사정없이 허물어뜨리곤 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현봉의 색채 사용이 성공적이라 할 수 있고, 그것이 바로 그가 나무가 지닌 본래의 순정한 색을 거스르지 않았다는 것에 기인한다는 것을 느꼈으리라 믿는다.
空山明月ㆍ42×31cm

참고하지 않은 역사는 역사가 아니다

“현대 서각은 개론서(槪論書) 하나 갖춰져 있지 않다. 서각가는 많으나 작품(?)이 없다는 질타도 자주 듣는다. 그래서인지 전통서각이든 현대서각이든 아직까지는 제대로 취급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 말은 평론가의 평론 거절로 인해 자서를 한 현봉의 자탄이다. 그러나 현봉은 “현대서각은 문자를 매개로 하되 문자라는 현실 대상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문자의 형상을 추상적 형태로 나타내는 것으로, 일단은 사고적(思考的)”인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밝히고 있다. ‘기능’으로서 ‘예술’의 경지에 이르지 못했다는 비판적 시각이 있든 말든 간에 자기의 길을 묵묵히 가겠다는 신념을, 그는 성격만큼 조용히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은근한 신념이야말로 그가 사용하는 오래 묵은 나무판만큼이나 질기고 단단한 바탕에 의한 것이다. 20년을 훨씬 넘긴 서예 경력, 국어국문학 전공자로서의 다져진 소양과 폭넓은 독서량, 4~5년에 걸친 서양화 수업과 문인화 수업, 전주대학교 대학원에서의 동양화 전공, 석사학위 논문으로서「현대서각의 조형성 연구」등. 새김질이 인류문명에 있어서 필연이었듯 현봉은 현대서각가로서의 자신을 필연으로 여기는 듯싶다. 모든 학습 결과와 경험을 즐거운 마음으로 새김질에 투영해내고 있다. 문자를 새기되 새겨지는 문자에 구속되지 않는다. 선을 새기되 이미 면을 헤아린다. 형체를 드러내되 그것이 수많은 형체를 되새김질하여 하나하나 생성한 치열한 정신의 파편들임을 증거 한다.
이런 현봉에게서 무한성을 발견해 내기란 어렵지 않다. 앞으로 펼쳐질 그 무한성의 실체에 대해서도 그에게 맡겨두면 될 것 같다. 대부분의 서각가들은 서예가를 겸하고 있다.
어떤 서예가가 언제 현대서각을 들고 나올지 모르는 일이다. 다만 우리가 함께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어떤 것이 순수 예술의 얼굴을 지닌 진짜 작품이냐이다. 현대서각은 10여 년을 조금 넘기는, 역사로 볼 수도 없이 짧은 기간 동안에 성공적 요소와 실패적 요소라는 두 얼굴을 보여주었다. 향후 어느 쪽을 선택할지는 오직 서각가들의 몫이다. ‘역사의 성공과 실패를 참고하지 않은 현실은 역사로 남을 수 없음’을 강변하는 것으로, 현봉 최수일전을 소개하는 이유를 대신하며 필을 접는다.

[월간까마 2002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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