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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인식(서예가, 서예로닷컴대표이사)     
  [나도 할 수 있겠다. -三農 金龜海 訓民正音展]

“나도 할 수 있겠다.”
작품 앞에서 심각할 이유가 하나도 없는 이들에 의해 툭 던져지는 말. 수백 수천 년의 과거를 요리저리 훑고, “과거를 끊어라!”라는 헤겔의 말을 되뇌고 되뇌는, 그래서 하루하루 역설이 옳아야 하는, 다시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라는 찬란한 출제(出題) 한 줄에 고개를 끄덕이다가, 다른 사람과 낯설어지려는 마침내는 내가 나와 낯설어지고자 하는 거친 호흡이 스민 역설덩어리들을 미래의 시공에 허허로이 내거는 몸부림 앞에, “나도 할 수 있겠다.”라는 이 희디흰 단어는 차라리 얼마나 진실한 멜로디인지.
삼농 김구해 훈민정음(三農 金龜海 訓民正音)전(물파아트센타, 2002. 10. 9~15)의 작품 앞에 선 순간 하필 “나도 할 수 있겠다.”는 말이 첫사랑처럼 뇌리를 스쳤었지. 어쩌면 말 이전에 뜻도 없다고 볼 수 없는 이 거친 말과, 삼농의 갈고 갈아 그만 희어져버린 속내의 순결함이 닮았으리라는, 그러나 이 둘의 끝을 이으면 결국 하나의 원이 되고 만다는 것 때문이었으리라, 더 이상 상실할 것이 없어 또 다시 잃어버릴 꺼리를 찾아 바람처럼 자리를 뜨려던 그가 짐을 싸려다 말고, 빈 심상 담보로 한글역사 한 페이지를 뚝 떼 내어 혼절하듯 토해 낮달처럼 걸어 놓고 터덕터덕 어디론가 떠나버렸다는 것을 알고 난 뒤에는 더 더욱 희게 느껴졌던가.

정음 2-2 / 29×24cm

붕어빵에 없는 붕어처럼 개인전 공간에 작가가 없는, 그래서 서정(敍情)은 더 진지하게 맴돌고 있었던가. 이전의 서예역사를 또는 어떤 서가를 외경의 대상으로 삼든 말든, 그 울타리에 기대거나 귀속되든 말든, 한 사람의 서예가가 전통적 유산에 속하든 말든, 그래서 과연 무엇이 진정한 전통인가와 나는 무엇인가 등을 묻든 말든, 그것은 각자의 생각. 서예와 서예가의 정의가 새롭게 필요한 시대, 빈약할 대로 빈약하라고 강변하는 시대의 횡포에 비칠거리는 자아로 인해 위기를 맞아야 하는 작가군들의 사이에서 삼농식의 새로운 정의와 광폭의 표현은 어떤 의미를 우리에게 던지는가?

그는 왕희지, 구양순, 왕탁은 왜 있어야 했고 이광사와 김정희는 왜 부정할 수가 없는가 하는 논란의 주변을 떠난 지 오래여서 이제는 관심도 없는 듯하다. 그러한 그를 향해 서예에서 문자와 문장이라는 읽을거리마저 걸러내버렸다고 반듯한 서법론 운운하거나 일탈된 사적 정서라고 치부한다면 이 어찌 낙하를 앞둔 가을 낙엽들의 수런거림과 별다를 것이 없다고 아니할까.
상대에 따라 이야기의 종류와 깊이는 다를 수밖에 없는 것. 삼농은 작가로서의 지적사유와 긴장, 최선의 상상과 체험, 그리고 창조의지 외에는 인위적인 자기옹호에 미련을 갖지 말라고, 삶의 복합적 현장에서 사회적 요직자가 되지 말라고 행동으로 작품으로 암시한다. 그래! 작가란 본질 적으로 중심부가 아닌 주변부에서 홀로 우주가 되어야 하는 존재가 아니던가. 세속적인 아름다움이나 전통, 경제나 권력에게 이 황량한 환경을 호소하며 이해를 구하지 말아야 되는 것이지. 언제 분노다운 분노가 한국 서단에 필묵처럼 무한 가능성으로 설까. 시은(市隱)이 대은(大隱)이라 하듯 작가와 작품이 언제 세속으로부터 완전한 고아가 될까.

정음 2-7 / 31×22cm
“기운생동의 현대적 개념의 파동(波動), 즉 공명현상” 부족과 “응축된 획선의 힘과 양감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정태적 작품 형상”이라는 지적에 동의하지 않아도 좋다. ‘획의 양감에 의해 정태적이고 파동이 적을 수밖에 없었다면, 획이 양감만큼의 무게로 더 깊이 박히지 않은 것과, 더욱 정태적이어도 좋으니 선 하나하나가 질김이 완성으로 넘쳐났으면 어땠을까’를 아쉬워하는 시각에 관심이 없어도 좋다. 세계와 자신을 이유로 더욱더 희어져 어떤 문외한이 “나도 할 수 있겠다.”로 다가갈 수 있는 참다운 주변부로 남는 사람이라면 그쯤의 문제는 별것이 아닐 터. 그래서 나는 삼농이 서예가의 홍수 속에 아플 곳을 아파하는 작가가 드문 시대, 아프디 아픈 사람이면서 당신이라도 당신이 앓고 있는 그 아픔이 세상의 사정에 의해 일방적으로 치유되는 것을 거부하는 작가였으면 좋겠다. 작금의 문화형식의 주류가 되고 있는 기능성 효율성에만 내통하는 문명적 비정(非情)을 조용히 물리치고 서예의 서정과 격정을 삼농식으로 보여줄 것을 간절히 바라고 바라는 것이다.

[월간까마 2002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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