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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인식(서예가, 서예로닷컴대표이사)     
  [도곡 김태정의 순정한 勞動謠, 왜 사는가?]

왜 작품을 하는가

‘왜 사는가?’ 이 물음에 대한 당신의 답은 무엇인가? 사람이 존재하는 한 불변한 채로 되풀이될 본질적이고 당연한 이 물음을 당신은 얼마나 심각하게 생각해 보았는가? 누구라서 이 내밀한 물음에 주저없이 답을 토할 수 있을까. 시 속에서는 애매모호한 추상형의 답이 답이라기보다는 우스갯소리 정도로 난무하고, 철학의 바다에서는 그 심오함으로, 화려한 수사로 다 갈래의 답을 제시해왔고 또 해 나갈 것이다.
‘왜 사는가?’ 이 물음에 간단없이 다 갈래의 답을 토하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예술가다. 순정하게 답을 제시해놓은 것이 있다. 바로 예술작품이다. ‘왜 작품을 하는가?’는 ‘왜 사는가?’ 에 대한 답을 찾는 행위와 직결된다. 또한 작가관이 분명하다면 그것은 곧 인생관이 또렷하다는 의미가 된다. 하여 필자는 예술작품에 마음의 눈을 돌리는 순간 사람 사는 이유를, 진하고 담백한 그 이유를 좀더 쉽게 찾을 수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나아가 보면 매우 흥미로운 사실이 하나 더 있다. ‘왜 작품을 하는가?’를 깊이 성찰하는 작가일수록 수고로움을 즐기는 진행형이라는 점이다. 자기 작품의 경향에 대해서 끝없이 긍정과 부정을 되풀이 한다. 누구보다 성실하게 노동성을 발휘하는 긍정적인 면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작품에 관한한 내면과 현실 모두에서 늘 변천을 거듭하는 것이다. 다만 변모에 변모를 더하는 하나하나의 과정을 하나하나의 결과로서 드러낼 뿐이다. 다른 사람의 눈에는 헛걸음으로 보일망정 자기의 길을 가고 만다. 어디론가 쉼 없이 달려가서는 자기가 사는 이유 하나를 간절히 간절히 길어와 자기의 길을 가보지 않은 게으른 사람들이 모를, 아니 도저히 알 수 없는 오래되고 미래적인 하얀 이야기를 툭하니 세상을 향해 보벽(輔壁)하는 것이다.

아메리카ㆍ2 / 70×120cm

황토바람 / 72×156cm

도곡 김태정 교수의 노동요

도곡 김태정(道谷 金兌庭) 교수(대구예술대)가 ‘순정한 노동요, 왜 사는가?’를 불렀다. 개관을 하면서부터 연이어 한 가닥 획기적인 바람을 한국서단에 불어넣고 있는 물파아트쎈타의 초대전(2002. 11. 4 )을 통해 그 노동요가 우렁차게 울려 퍼졌다. 그의 노동요는 다시 한 번 그가 부지런한 예술노동자임을 분명히 밝혔다. ‘왜 사는가?’를 ‘왜 작품을 하는가?’로 치열하게 밝혀나가는 철학자임을 확인시켰다. 왜 사는가라는 험난한 탐험코스를 필묵을 무기로 종횡으로 누비는 용기 있는 탐험가라는 것을 각인시켰다. 무수히 놓여있는 편안한 세상의 길로부터 고립하지 못해서 안달이 난 진정한 시인이라는 것을 낮은 아우성으로 깊이 새겼다.
그가 소유한 탐구와 성찰의 뜨거운 열정은 마침내 그의 먹(그가 개발한 붉은 황토 먹)이 벌겋게 달아오르는 것으로 드러났다. 그의 붓이 성난 싸움닭의 꼬리 마냥 갈기가 서는 것으로 드러났다. 벌겋게 충혈된 먹, 갈기선 붓으로 거침없이 쏟아낸 붉은 호흡, 찍히고 새겨지면서 파고든 육질의 가락들, 여기에 기운생동(氣韻生動)이라는 단어는 오히려 얼마나 나약한가.
그는 이 지면 위에 굳이 밝힐 필요가 없을 정도로 한국서단이 주지하는 화려한 이력의 소유자다. 이미 오래전부터 한국서단을 넘어서서 세계 속의 작가로서 진일보를 거듭하고 있다는 것도 아는 사람은 다 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현재를 자꾸만 다른 사람으로부터 낯선 존재의 자리에

두려한다. 심지어 스스로 바보가 되기를 주저하지 않고 있다. 보통사람의 경우라면 이제는 그야말로 한 발짝 물러서서(실제로 그는 대구예술대학 교수직의 정년퇴임을 앞두고 있다.) 육신의 안위를 찾으며 쉬고 싶어 할 나이의 그가 뻘과 노도를 되받아 치며 간척을 거듭하고 있다. 서예정신과 필묵하나 움켜쥐고 거침없이 험로를 행보한다. 그는 왜 이미 이룩한 편히 살 만한 기와집을 스스로 허물고 누덕누덕 흙집을 지으려 하는가. 왜 벌겋게 달아오른 먹 자국을 혈흔처럼 남기는가. 왜 모두가 얌전히 다듬어 세우는 붓을 찢어 눕히고 둔중한 철공이의 흔적을 새기는가. 왜 화선지 위에서 마르기도 벅찬 얼룩진 피멍을 남기는 것을 넘어 다시 그 위에 회칠을 가하는가 하면 캔바스를 그의 질긴 공간 안에, 필묵의 정한한 영역 안에 들여오는가. 그리하여 그가 그린 벌건 대나무에는 태풍이 임하고 그의 문자를 해체한 선에는 뭉텅한 붓의 궤적이 폭발 직전 화산의 용암인 듯 부글부글 끓고 있는가.
그러한 그이지만 알고 보면 그는 오직 서예정신과 서예형식의 신봉자다. 다만 그 정신과 필묵이 지닌 영역을 무한대로 확장시키기 위해서는 무엇이라도 끌어오기 위해 혼신을 다하는 실험과 도전의 선구자일 뿐이다. 지도에도 없고 세상의 말과 글에도 없는 세계를 꿈꾸고 그것을 이루고야 말겠다는 신념 하나밖에 가진 것이 없는 천상의 예술가일 뿐이다. 그리하여 그가 토해낸 ‘왜 사는가?’ 는 더러 필묵과 서예 형식을 벗어날 때도 있었고, 그로 인해 항간에서는 그를 두고 서예가니 아니니 하는 왈가왈부를 하기도 했다.
이 전시의 기획자이자 서예평론가 손병철은 “도곡 김태정은 이순(耳順)의 나이에 환골탈태하듯 화가가 아닌 새로운 서예가로 우리 앞에 돌아 온 것이다. 낙서화가 아닌 필묵화로의 탈바꿈이기도 하다.”라고 한다. 그러나 필자가 아는 그는 서예정신과 필묵을 떠난 적이 없으니 돌아왔다는 것 또한 세간의 판단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기다림의 끝

사람의 한 생에서 세상과 자기를 올바르게 포착하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세상과 자기 사이에 일정한 거리를 두는 연습과 실제를 얼마나 반복해야 그 둘이 하나 되는 진정성을 몸으로 느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세상으로부터 무한히 고립되고 뇌로부터 실핏줄까지 스스로 자멸시켜야 거듭날 수 있음을 말하는 그의 강변을 긍정하는 일은 다만 우리에게 던져진 몫이라고 할 수 있다고 하겠다.
그의 자기부정에 의한 간단없는 변모는 그 끝에서 기다리고 있는 간절한 그리움 덩어리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기다림이란 다 비운 순정함으로 만남에 다가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기다림의 대척지에 서있는 만남을 온전히 접할 수 없을 것이다.
書體抽象 / 65.1×53cm

그러므로 오직 만남만을 위해 서두르면 서두를수록 결국 진정한 만남과는 조우할 수 없게 되지 않겠는가. 더 갈데없이 원시적이고 원시적인 알맹이들로 가득한 그의 필묵의 노래들이 아직도 먼 길을 개척하거나 돌아가기를 주저하지 않는 것은 그의 진정한 기다림의 끝을 짐작하게 한다. 그에게서 우리가 배우고 느낄 것은 작가란 세상을 부정하고 자기를 부정하는 데서 거듭난다는 실체의 증명이다. 그는 “이른 새벽 눈을 뜨면 가부좌의 상태에서 무념무상의 세계로 몰입을 시행한다.”고 한다. 무한한 상상의 세계를 체험하기 위해 “자신을 시속에서 벗어나도록 유도”한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작업광경은 ‘천진난만’과 ‘광기’가 시차 없이 조화를 이루는 것, 바로 그것이다. 그래서 그는 온통 생각하고 번뇌하기를 지상의 목표로 삼는 것이 작가라고 외치다가 노동력이 부족한 작가의 위험성에 가차 없이 경종을 울린다. 그는 한국에 이은 미국전을 연다. 뉴욕의 중심가 맨하탄 파크에브뉴에 있는 코리아갤러리초대전2002. 12. 10~27)을 통해 그의 진가는 다시 한 번 평가를 받을 것이다. 명상적이고 단순하며 계시적인가 하면 돈오적(頓悟的)이어서 더욱 동양적이고 한국적이며 도곡적인 그의 작품이 서구와 서구인들에게 ‘왜 사는가?’ 에 대한 답 하나를 분명하게 각인할 것으로 믿는다.

[월간까마 2003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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