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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은(시인)     
  [전생에 닦아 놓은 청정한 詩心 ]

고 은 (시인)



손인식의 시를 보고 내 가슴 속에 시원한 그늘이 졌다. 가다 길을 멈춰야 했다. 나는 오래 전부터 시는 서예 혹은 서도(書道)를 닮았다고 생각해 왔다. 시의 직관과 서의 중심에는 어떤 여지가 끼어 들지 못하는 극한을 함께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시가 아닌 글자의 절묘한 움직임이 살아 있는 서체를 통해서 시를 발견하지 않을 수 없다.

더구나 우리 전통사회에서는 시·서·화를 갖춘 예술의 경지를 3절이라 하고 거기에 금(琴)이나 창(唱)을 더하면 4절이라고 했다. 가령 추사의 시·서·화 일체론은 시를 시만으로 갇혀 있게 하지 않고 서화를 시로부터 멀리 있게 하지 않음으로써 시의 마음이 곧 서화의 얼, 그것이도록 하고 있다. 굳이 한 사람이 이 같은 벅찬 일을 하지 못할 바에는 동시대의 시인과 서예인 그리고 화가들을 아울러 3절로 말해서 당대의 풍류로 섬겼다.

손인식은 그런 예술의 배경을 등에 지고 서 있다. 지난 여름의 시인학교에서 본 그를 잊지 못한다. 그의 창 솜씨는 타고난 소리 태깔도 힘차고 곱지만 그가 서예로도 자유분방한 서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만으로 억울해서인지 그는 그 이상으로 시인이다.

그의 시 원고 맨 앞에서부터 내 눈이 떠졌다.

이것은 '붓' 연작의 1에 해당하는 [제주도 문섬에서]이다.

나는 제주도 서귀포 앞 바다의 섬을 보며 3년 동안 산 적이 있으나 그 섬의 하나를 이렇게 노래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이 시집의 시들은 '붓' 연작의 큰 주제로부터 벗어나지 않는다. 붓이 삼라만상의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글씨로 살아나고, 그림으로, 소리로 살아나 한밤중 정수리가 툭 터지는 깨침이 없지 않으니 그의 단호한 언어활용은 아직 다 다듬어지지 않는 경우에도 벌써 눈부신 광채를 만난다.

아마도 손인식에게는 전생에 닦아 놓은 청정한 심상이 아직껏 흐려지지 않는 거울로 세상의 여러 얼굴을 비춰주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사물은 벌써 그 거울 속으로 들어가 새로운 손님이 되는지 모른다. 손인식의 소리를 들었고 그의 그림과 글씨를 보았고 산문을 읽었으며 시를 보게 되었으니 그 기쁨 속에는 그의 내일을 축원하는 우정도 들어 있다. 나는 그의 예술과 함께 그의 반질반질하지 않은 넉넉한 품성의 인간됨을 좋아하지 않을 수 없다. 어떤 시는 어떤 인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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