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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인식(, )     
  [행복과 자유! 찾고 느끼는 사람의 것]

행복과 자유! 찾고 느끼는 사람의 것
- 인도네시아 한인미협전을 보고_

손인식 (서화가)

프롤로그

‘행복과 자유!’를 싫어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가만히 생각해보자. 나는 오늘 행복과 자유를 얻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지. 행복과 자유란 결코 쉽게 얻어지지 않는 보배 중의 보배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 보배는 이 세상 도처에, 또는 바로 자기 안에 존재한다. 그러나 존재 그 자체로 보배가 되는 것은 아니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이듯, 오직 보배로 삼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만이 소유할 수 있다. 지성과 감성, 영성(靈性)을 목적으로 닦고 또 닦는 사람에 의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이다. 다행히 슬기로운 사람들은 그것을 찾는 방법으로써 늘 학문을 하고 예술을 사랑하며 종교를 통해 행복과 자유를 누리며, 마침내 자신을 스스로 구원의 입구로 안내한다.

예술이란 무엇인가? 일단 행복과 자유를 찾는 하나의 방법이라고 쉽게 말해두자. 그러나 프로세스와 결과의 다양성 때문에, 한마디로 ‘이것’ 이라고 말할 수 없으며 직접 실행하기란 더욱 어렵다. 예컨대 세계가 하나의 책이라면 일반적인 사람들이 목차 정도만 읽어도 무방할 때, 예술가들은 책 전체를 읽거나 어느 한 부분이라도 아주 자세히 읽어야 하며, 읽고 나서는 서로 다른 방법으로 표현해야 한다.

이 글은 제4회 인도네시아 한인미협전(2003. 5. 30 ~ 6. 2, ATLET CENTURY PARK HOTEL)의 리뷰다. 미술 작품이란 때로 보는 것 그 자체로 전부일 수 있다. 그러나 때로는 도식적이거나 복잡한 이야기들이 필요할 때도 있다. 필자는 앞의 두 가지를 절충하는 형태로 이 글을 쓰고자 한다. 특히 전체 작가와 작품을 통해서 인도네시아 한인미협전이 지닌 숨겨진 가치성이 무엇인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전시회에 동참한 작가가 쓰는 글이니 더러 모순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없지 않을 것이다. 필자도 이를 우려하지 않은 바는 아니다. 하지만 가치를 전달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 평소 필자의 생각이기 때문에, 이를 실천으로 옮기는 것이다. 예술품에 대한 안내는 절대적이다. 작가와 관객, 작품과 감상자를 가까워지게 하는 것이자 예술이 지닌 공익성의 실현이다. 미학자 단토의 “해석이 비로소 작품을 작품이게 한다.”는 말을 긍정하면서.

본론에 앞서 이것은 본격적 비평의 글이 아님을 밝힌다. 전문적 기법이나 조형을 논하기 보다는, 작가의 의도나 작품이 의미하는 것들을 그저 감상자의 입장에서 이해하기 편하도록 전달하면서 이 전시를 기록으로 남기고자 하는 것이다. 노력한 만큼 알게 되고, 아는 만큼 보게 되며, 본 만큼 느끼는 게 되는 것이 작품이다. 이 안내로 인해 예술작품을 조금이나마 본질적 차원에서 이해하는 계기가 된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고, 아울러 흥미로우면서도 유익한 글이었다는 기억이 덤으로 얹혀지기를 감히 기대해 본다.

영적 평화를 갈구하는 메시지, 강미혜

20세기의 많은 예술가들의 공통적인 말이 ‘어린이와 같이 되지 않고서는…’이다. 모든 작가들이 어린이처럼 순진무구해져야만 좋은 작품을 할 수 있다는 의미다. 하지만 기실 그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그러나 강미혜! 그는 이미 그의 영혼이 예쁘고 천진한 어린이의 것으로 귀의되어 있음을 이번 작품들을 통해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는 그의 순백함으로 사람들이 얻을 수 있는 참다운 가치가 무엇인가를 암시해주고, 그것을 모두가 찾아나서야 한다고 세밀하면서도 아름답게 역설해 주었다. 이것이 생활인으로서 거짓 없는 그의 평소모습이기에 더욱 가치를 지닌다. 당당한 외모와 글래머적 이미지에 비하면 뜬금없기까지 하다. “현상을 입증하기보다는 이상을 표현하려해요. 오직 영적 평화를 참된 것으로 여기고 있지요. 그것이 곧 현실에다가 행복을 심는 일이 아닐까요?”

한국미의 근간을 빚은, 강복신

‘자연감, 소박성, 단순성, 해학, 비애’가 한국미의 근간임은 미학자들이 누차에 걸쳐 밝힌바 있다. 그것은 역사 속에서 생성되고 굴곡을 겪으면서 뼈대로 남아, 때와 사람을 통해 살을 붙이고 피를 돌리면서 세계미의 무리 속에다 ‘한국의 미’라는 우뚝한 봉오리 하나를 세워놓았다. 강복신은 이 우뚝한 봉오리 한 귀퉁이 뚜욱 떼어다가 흙으로 버무리고 비빈 다음 다시 쌓아 올려 자카르타의 잎 넓은 잔디 위에 사뿐히 올려놓고, 통 굵은 대금이 육중하게 흘려내는 저음처럼 한국미의 뿌리와 줄기를 빚어 주었다. 싱그런 매력과 활달한 성격의 소유자인 작가의 내면이 이처럼 소박하다는 것을 작품으로 전달 받아보는 것, 이는 분명 작품만이 지니는 또 다른 감명이 아닐 수 없다.

감각적 꿈, 그 세계로의 유영, CHARLY(고광철)

프로이드는 “꿈이야말로 인간에게 잠재한 무의식을 실현하는 장”이라고 했다. CHARLY 고! 그는 이 전시를 통해 현실에다 꿈을 가득 들여놓고 생을 살아내는 작가다운 작가임을 각인해 주었다. 늘 자신을 아마추어로 규정하면서도 끊임없는 작업량이나 상상을 뛰어넘는 창의력이 가져온 결과라 하겠다. 그는 늘 나긋나긋한 형태의 꿈을 현실의 도처에다 아름답게 장식하며 산다. 누구라도 그의 꿈에 동참할 수만 있다면 그것은 행운을 얻은 것임이 틀림없으리라. 그러나 그것은 보통의 감성소유자로서는 될 일이 아니니 함부로 넘보지 말아야 한다. 그는 그의 꿈의 결과물들인 작품을 가까이 보는 것으로서 꿈에 동참하는 하나의 방법을 제시하기도 했다. 그의 작품을 보면서 달콤한 색조들이 나선형의 모자이크를 이루며 온몸을 감싸는 것을 느꼈던 것은 꼭 필자만이 아니었을 듯.

꽃보다 풍요롭고 아름다운 母女之情, 김희성

“오 장미여/화려한 오만이여/고독한 황홀이여” (조병화, 「오 장미여」 중에서). 이 시구를 읽는 순간 우리는 장미꽃의 이미지가 4월의 봄빛처럼 다가드는 것을 금방 느낄 수 있다. 귀족적인 화려함이나 삶의 모순을 상징하는 이미지의 장미, 그러나 필자가 김희성의 장미 그림을 보는 순간 거기에는 장미가 없었다. 장미꽃보다 훨씬 비싸게 피어난 김희성의 함박웃음만 보였다. 그러나 정작 작가는 “어머니가 좋아하시는 장미를 어머니를 위해 그렸다.”고 했다. 최근에 첫 아이의 엄마가 된 그가 어머니에 대한 감사와 그리움 몇 가닥을 올올히 뽑아 장미를 수놓는 순간 어머니는 한없이 너그럽고 자애로운 미소로 딸의 섬섬옥수에서 피어나는 바람을 맞으셨을 것이다. 꽃보다 풍요롭고 아름다운 모녀지정(母女之情)을 보는 마음, 아! 오늘 어머니의 정이 더욱 그립다.

무덤덤한 듯 화려한 감성집단의 선구자, 박흥식

사람이 사는 곳에는 어디나 문화가 생성된다. 그러나 그것이 어떤 문화이고 그 질이 어떤 것이냐 하는 것은 그것을 주도하는 사람들에 의해 다르게 드러날 수밖에 없다. 자카르타의 한인미협전이 작가 박흥식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다 안다. 그는 물 조리 하나 달랑 들고 마르디 마른 땅을 적셔 나가는 용기와 개척 정신으로 이곳 자카르타에 한국미술의 씨앗을 심었다. 이제는 제법 줄기와 가지를 무성하게 하고 열매를 생산하는 감성집단이라는 나무 한 그루를 가꾸어 냈다. 그러고도 그는 오직 진리만을 전달하는 눈 쌓인 시골 교회처럼, 화물을 기다리는 화차처럼 소박함과 순수함으로, 혼탁을 가리지 않고 지류를 받아들이는 을숙도가 되어 무덤덤하게 ‘추령의 가을’과 같은 미의 향연을 주도해 나간다. 그가 심은 아름다움의 나무여! 모두의 아름다움이여! 부디 부디 이 땅 위에 무성할 진저.

생략과 사실성, 터프하게 쏟아낸 수묵, 반영희

우리는 늘 추억을 그리며 산다. 가까이 있으면서도 가지 못하거나, 되돌아 갈 수 없는 추억을 말한다. 쓴다. 그리고 그리움의 크기만큼 그림을 그린다. 녹천 반영희! 그는 그가 본 자연을 세밀하게 재현했는가 하면, 그 뼈와 근육을 위해 열정을 토하기도 했고, 다만 인상적 묘사를 하면서 속정을 슬쩍 내비치기도 했다. 그리움의 대상을 생략과 사실성으로 입증했는가 하면, 다시 터프하게 쏟아낸 수묵의 양감으로 관객 모두에게 추억을 되살려 주었다. 나이를 가늠할 수 없이 발랄하고(?) 다양한 노래 솜씨만큼이나 보는 사람들의 눈과 마음을 흐뭇하게 했다. 그 열정의 근원은 어디일까?

아빠 까바르? 손인식

우연이 아니었나보다. 천혜의 휴양지 빈탄의 야자수 잎을 희롱하던 바람이 낯설지 않았던 것은. 그로부터 2년 후인 2000년 10월, 나는 한국학교, 한국부인회, 우이대학중문과, 일본부인회 등 10여 곳의 워크샾과 MULIA 호텔 전시회를 통해 서예바람 한 자락을 자카르타에 내걸었었다. 이제 다시 두리안의 향내 위에 먹향을 포개고 망기스의 신비스런 하얀 속살에 내 살내 나는 붓자국을 새기려 한다. 오늘! 만해선사의 시구가 야자수 잎을 타고 서설처럼 날린다. “사람이 머무는 곳 어찌 다 고향이 아니겠는가?”

힘 있게 다가온 우리의 따뜻한 이웃, 위정숙

프리드리히 쉴러는 “미적 유희 속에서 인간은 자유롭고 완전해진다.”고 했다. 현대에 와서 예술이 현실 세계를 고발하기도 하고, 해석하며 새롭게 건설하기도 하는 것도 어쩌면 더 자유롭고 완전해지기 위한 노력의 결과인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우리는 작가 위정숙이 작품 속에서 현대 전쟁의 폐해를 증거하고, 가족과 친구 사회와의 사이에서 생겨날 수 있는 각종 대화를 형상으로 그리며, 또 과거를 회상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그가 세계를 대하는 느낌과 표현 화법을 각자의 것과 비교해 볼 필요가 있다. 그 순간 작가 위정숙은 냉철한 혜안을 지닌 아주 따뜻한 이웃으로 벌써 그대 곁에 가까이 다가와 있을 것이다.

칼금처럼 드러난 신념의 명료성, 유명옥

작가에게서 작품을 느끼고 작품에서 작가를 느낄 수 있다는 것은 분명 흥미를 넘어선다. 진리를 느꼈을 때의 희열이 아닐 수 없다. 명료성! 유명옥이 출품한 3점의 정물과 1점의 비구상 작품에서 일관되게 흐르는 것은 명료성이었다. 이는 분명히 작가가 작가다운 신념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정지를 표상하는 정물에서 ‘시간이 흐르고 있다’라는 진실을 표표히 성립시키는가 했더니, 상상의 나래를 구속할 아무런 울타리가 없을 것 같은 비구상 작품에서 엄격함을 덤으로 얹어 둔중한 이미지 하나를 칼금처럼 그어 당당하게 드러내 놓았다. 그는 이처럼 구상과 비구상의 경계를 자연스럽게 허물고 오직 유명옥이라는 이미지 하나를 강열하고 명료하게 심었다. 그리고 그는 바위같이 넉살스럽게 시침을 때고, 속내 아는 구안자(具眼者)를 먼 산 보듯 기다리고 있었다.

반성과 관조로서의 거울보기, 이성숙

우리는 늘 거울을 본다. 스치듯 또는 찬찬히 거울 속 가짜의 외면을 관찰한다. 우리는 일상의 거울보기에서 과연 무엇을 얻는가? 반성과 관조를 통한 과거와 현실, 미래 투시하기. 이것은 이번 전시회를 통해 이성숙이 제시한 거울보기의 한 방법이다. 그가 ‘거울을 마주하고 그린 자화상’은 철저하게, 그리고 솔직 담대하게 그의 내면을 파고들고 있다. ‘아이를 안은 엄마, 엄마에게 안긴 아이’를 통해서는 자신을 낳고 기른 어머니에 대한 정과 유아기의 자신을 회고하면서 현실의 소중함을 강조했다. 그런가 하면 물레질을 하는 늙은이의 손을 부각시켜 시간의 수레바퀴 속에서 드디어 우리 모두가 다다르고야 말 미래에 어떤 모습으로 안착할 것인가를 숨 가쁘게 물었다. 이 모두는 세상의 진실과 참 아름다움이 어디에 존재하는가를 묻는 것이다. 당신은 어떤 말과 행동으로 이 물음에 대한 답을 하려는가?

정직하고 순수한 삶의 기록, 이수진

지극한 아름다움이란 무엇일까? 어쩌면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지 하루 또 하루의 삶을 정직하고 순수하게 기록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수진의 그림들은 이수진이 철저히 인도네시아라는 현실에 동화된 삶을 살고 있음을 살며시 내비치고 있다. 처음 마주하면 다소 성글 것 같은 그의 외모나 직설 화법 뒤에 아무나 넘보지 못할 비단결 같은 아름다움이 잠재하고 있음을 수줍게 밝히고 있다. 사람에게 절대적인 것이 먹거리이지만 지저분한 뒷모습을 남기는 것이 또한 먹거리이기도 하다. 그 먹을거리와 일상을 사랑하는 마음을 이처럼 아름답고 생생하게 기록할 수 있다는 것은 분명 그에게 주어진 커다란 행운이다. 이 소리 없는 아우성을 누구라서 쉽사리 내지를 수 있단 말인가. 창조자에 버금가는 행운을 지닌, 혹은 그 라이선스를 가진 작가여! 그 행운을 위해 건배!

난이여! 허공이여! 바람과 이슬이여! 이은수

그대 허공! 허공에 기댄 난 잎이 부르는, 바람으로 부르는 노랠 들었는가. 이슬이 난꽃 위를 진양조로 거닐며 내지르는 장단을 들었는가! 삼라만상이 깨이는 이른 새벽 심산유곡의 소리 없는 이 합창을 그대는 정녕 듣지 못했는가? 그렇다면 작가 이은수가 그들과 함께 부르는 아리디 아린 환희의 대화를, 노래를 보았는가? 그 자신 늘 난을 위해 허공이, 바람이, 이슬이, 된다는 것을 짐작해 보았는가? 난잎 따라 저도 휘어지며 난 꽃 따라 저 또한 발그랗고 하얀 표정으로 둘레를 만드는 허공, 마침내는 바람에 흔들리는 난을 위해 제 몸을 흔들어 주는 허공을 향해 끝없이 감사의 기도를 올리는 작가 이은수가 누구인지 알려는가? 그래 많은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그 작은 것을 아는 것, 그의 행복이 거기에 있었음을….

살아있는 정이여! 산천이여! 이춘희

‘본 대로 느낀 대로’. 이 말은 어떤 행위를 촉발시키는 가장 직접적인 계기다. 작가 이춘희의 작품을 보는 순간 필자는 어느 사이 초가지붕 및 양지바른 곳에 낙숫물을 세던 어릴 적으로 돌아갔고, 청량리에서 춘천행 열차를 타고 양수리 언저리를 돌아나가고 있는 것처럼 착각을 했다. 작품은 결과라기보다는 프로세스의 흔적이며 접근하려는 의지의 표상이다. 더 나아가서 눈과 마음이 살아있다는 솔직한 표현이다. 그래서 우리는 작가 이춘희가 추출한 결과보다는 그의 눈을 따라 마음을 따라 우리네 끈적끈적한 정이 배인 산천을 한 바탕 훠이 훠이 돌아봄직 하지 않는가?

생명력 왕성한 꽃들, 푸른 타종, 이현미

야무진 붓 터치가 시공을 제압한다. 평면 위에 생명력 왕성한 이현미의 꽃들이 산다. 절제의 미를 절대치로 뽐내고 있다. 그러기에 어느 관람객이 작가 이현미가 간추려 내고 있는 꽃송이들의 표정이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지를 알아 차렸다면 그는 이 전시회 작품들을 다 소장한 것이라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 그래서 자신을 어떤 것으로도 표현할 수 없을 때 꽃으로 대신 한다던가! 우리는 그 꽃을 늘 바라기 하면서 산다. 꽃심(꽃 같은 핵심)이 되기를 소망하면서 산다. 이때 이현미의 당찬 경종이 울린다. 꺾-꽂이 된 꽃을 통해서 울린다. 생명의 한계성과 덧없이 추구하는 쾌락의 헛됨을 향해, 외적 아름다움만을 추구하는 현대인의 일시성을 향해 새벽 예불의 범종처럼 푸르고 푸른 타종을 한다.

순백의 무(無)를 꿈꾸는 작가, 홍미숙

점과 선이 가득하다. 점이 선으로 화하고 선은 다시 형을 이룬다. 형상은 최대한 생략되어있다. 생략된 형상들은 오히려 풍요와 자유를 말하고, 환희를 노래한다. 그리고 오직 사물이 지닌 본질을 보라 한다. 가득한가 했더니 여기저기 비어 있다. 여백의 모습이 다양하다. 가득한 곳에 생겨난 여백들에는 생의 진리가 빼곡히 채워져 가을 들판처럼 다가선다. 아! 그래서 작품은 오래 오래 그 속내를 보아야 하는가보다. 마침내 작가가 꿈꾸는 것은 순백의 무(無)라는 것을, 그 역설이 짐작이 간다. 그래! 늘 하루하루 역설이 옳아야 하는 우리네 삶에서 마침내 우리가 찾아내야 하는 것은 순백의 무(無)일터. 그랬다. 작가 홍미숙이 제시하는 것은 종교를 통한 구원이요, 미술적 상징주의요, 설화적 교훈이리라. 그래서 작품은 빵과 물이 아니면서도 때로 빵과 물보다 더 중요한 것이 된다.

경험과 지성, 감성과 영성의 동반, 홍영리

“작품에서 벗어나는 순간 작품이 이루어졌어요. 일종의 체험한 현실에 대한 사랑의 표현과 고백 같은 것이지요.” 그렇다. 진리란 책이나 문자 안에서 양반다리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가까이는 가족을 극진히 사랑하는 데 있고, 나아가 자연을 벗하는 데 있으며, 간절히 간절히 종교를 체험하는 데 있다. 그리고 성실하게 또는 처절하게 부여된 삶을 살아내는 데 있다. 작가 홍영희는 그의 경험과 축적한 지성, 발양한 감성과 쌓고 쌓은 종교적 영성을 동반해 저리도록 사랑하는 현실을 신앙고백 하듯, 씨줄 날줄 삼아 배를 짜듯 그렇게 모자이크 해냈다. 그리하여 우리는 “자연은 아름답다. 하지만 인간의 예술은 더 아름답다.”고 감히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작가여 내일은 그대의 것일지니 오늘은 오직 파이팅, 파이팅!

에필로그

오늘날은 상상만큼의 크기로 발달한 과학기술이 사람들의 삶을 풍요롭고 편리하게 한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사람이 눈과 손으로 판단하고 가름하는 것이어서 작품과는 그 한계가 다르다. 작품이란 보이지 않는 마음과 보이는 현상이 조화된 것으로서 한 가지로 한계를 지을 수 없는 것이 그 특징이다.

특히 좋은 작품은 그것을 감상하는 사람에 따라 여러 가지 각기 다른 가치를 생산한다. 그 가치를 일러 흔히 작품이 지니고 있는 사회적 공리성이라 한다. 이 공리성 때문에 국가는 앞장서서 박물관과 미술관을 설립 운영하며, 컬렉터들은 다종의 작품을 수집 소장한다.

인도네시아 한인미협전은 이번이 제4회째이다. 한국 교민들께서는 올해도 변함없이 많은 관심을 가지고 여러 방법으로 전시회를 빛내 주시고 이 감성집단이 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겨 주셨다. 특히 어려운 여건 가운데에서도 다수의 뜻있는 분들이 기꺼이 작품을 소장해 주셨다. 소장자분들께 거듭 감사를 드리는 마음 출품작가 모두가 같을 것이다.

어느 애호가가 필자에게 던진 말 중에 잊혀지지 않는 것이 있다. “은행 통장에 있을 때는 자랑할 만큼의 돈도 아니던 것이, 작품으로 바뀌어 집안에 걸린 다음부터는 자랑거리가 되더라는······.”

좋은 작품을 소장한다는 것은 소장자의 품위가 은근히 격상되는 것이기도 하거니와, 벽에 걸린 작품이 대화를 원활하게 소통시켜주는 매개가 되기도 한다. 이번 전시회의 작품들이 어떤 장소의 공간을 보벽(輔壁)하든 그 역할을 충분히 할 것으로 믿는다.

그러므로 인도네시아 한인미협이 해야 할 일 또한 선명하고 무거워진다. 당연히 우선하는 의무는 최고 작품 생산을 위한 매진이며, 여기에 다양한 시도를 통해 그 위상을 스스로 다지고 높여나가기를 바라는 마음은 지켜보는 사람 모두가 같을 것이다. 출품작 모두가 수록된 도록이었다면 더욱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은 도록을 통한 감상자가 의외로 많다는 것을 알게 된 다음이다.

또 전시회의 의의와 성격, 작품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도록 비평과 작가의 창작 단상을 작품과 함께 싣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인데 새삼 이를 떠올리기도 했다. 이곳 감상자들의 안목을 높이는 것도 이곳 작가들이 해야 할 일 중의 하나가 아닐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이에 더하여 작가가 지닌 정체성이나 현실에 관한 시각을 밝히는 주제가 있는 전시, 진지한 예술세계와 교육적 가치를 지닌 전시도 함께 고려할 부분이 아닌가 한다. 이는 전시기간 동안 관람자를 위한 설명회 개최와, 함께 참여할 수 있는 프로그램 개발, 활발한 홍보 등을 포함한다.

베토벤은 “… 나는 인류를 위해 포도주를 빚었노라.”고 외쳤다. 자카르타 한인미협의 작가들도 자신을 위해서, 나아가 한국교민사회를 위해서, 또는 삶의 터전인 자카르타를 위해서, 오늘 어떤 이름을 쓰고 남길 것인가에 대해서 고뇌하는 것으로 안다. 그 결과가 다음 전시회에는 어떻게 드러날지 자못 기다려진다.

2003년 6월 자카르타 벼룩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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