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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기획연재 > 서예의 회화미 회화의 서예미


이탈 속의궤도

글 인재 손인식 (서예가, 월간까마 편집주간)

“예술에 있어서의 예술은 곧예술이다. 예술의 종말도 예술로서의예술이다. 예술의 종말은 종말이아니다.” 이 말은 애드 라인하트가 한 말이다. 동어가 반복됨으로써 익살스럽게 꾸민 말로 생각하거나 흥미를 유발시키려는 구절 정도로 여기기 쉽다. 또 예술의 극점을 실루엣 처리한 괴변쯤으로 생각할 수도 있는 말이다.

그러나 이 경구(警句)는 예술의 오묘한 특성을 표현한 말임에 틀림없다. 예술 작품의 실체가 행위자나 감상자에게는 물론이요, 역사가 흐른 뒤까지도 모두 주관적 독립 주체로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예술은 분명 많은 사람들에 의해 끊임없이 그 극점을 도전당하지만 그 과정은 모두가 다르고 극점 또한 하나로 드러나지 않는다. 따라서 이 경구는 예술의 본질에 접근하기 위해서 각자가 깊고 넓게 사색해야 됨을 말하고 있다고 하겠다.

책을 읽다가 반짝 안겨 온 이 경구를 대하는 순간 나는 한동안 눈길을 떼어내지 못하고 많은 것을 생각했다.고암 회화의 원동력이요, 한 축으로 존재하는 서예미를 탐색해 가고 있는 나에게 이제 창을 밝히려 드는 여명같이, 새벽 골목길을 나서는 사람들의 두런거림같이 불확실하지만 희망적인 상상력을 전개시켜 주었기 때문이다. 고암은 왜 그의 회화 모티브로서 문자의 형과 서예적 선을 반복 차용하고 있을까? 그는 왜 많은 작품에서 서예적 요소와 동양적 이미지를 화두로 삼고 있을까? 그는 왜 30여 년을 프랑스에 살면서도 서구의 표현 방식보다는 동양적, 그리고 서예적 표현 방식을 즐겼을까? 꼬리를 무는 의문점들, 고암 회화의 서예미를 밝히는 열쇠라 할 수 있는 이런 의문점들이야 말로 고암 회화의 서예미를 탐구해야 할 절대적 당위를 제공하고 있다 하겠다.

고암의 회화에는 아름다운 형상의 창조라는 미술적 명제보다는 인간의 정신과 육체가 끊임없이 갈구하는 본질을 예술로 표현해내기 위해 치열하게, 그리고 담담하게 싸워 온 흔적이 들어 있다. 그는 결코 시각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아름다움만을 그리려 한 작가가 아니다. 시각으로 느끼는 미가 아닌 삶의 이면에서 자기 예술의 진정성을 찾으려 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그는 문자의 형태가 시각에 전달하는 이미지와, 서예적 선이 전개하는 자연 이미지를 그의 예술 완성을 위해 끊임없이 차용한 것이다. 이것을 원용하면 ‘자연회귀’나 ‘자연주의’ 사상과도 그 궤를 같이한다고 볼 수 있으며, 그의 예술은 그것의 구체적 실현이라고 할 수 있다.

애드 라인하트가 예술의 본질을 말하기 위해 동어 반복을 했듯이, 고암은 인간이 창조했고 인간과 분리될 수 없는 문자의 형과 자연미가 내재된 서예 선을 통해 예술 표현의 한 방법을 끈질기게 탐구하여 밝히고 있는 것이다. 그 속에는 지난 호에서 밝힌 바와 같이 서구 조형의 성과와 동양스러운 우주율을 함께 표현하고자 하는 방법적 의지가 담겨 있으며, 그것은 동양 정신과 서예 정신을 그의 예술 생명으로 간직한 결과임을 알 수 있다. 이것이 한국의 서단이나 서예가에게 시사하는 것이 그 얼마나 큰가! 아직도 ‘서예가 예술이냐, 아니냐’란 논란이 일부에서 존재하고 있으니 더욱 그렇다.

고암의 회화는 이같은 논란이 얼마나 소모적이고 가치 없는 것인가를 일단으로 증명하고 있다고 하겠다. 신체로 감지한 예술 정신, 예술 옷의실체 고암은 “나의 작품 경향은 언제나 우리 민족 미술을 새로운 표현으로 국제화하는 데 역점을 두고 있습니다.”(1975년 5월 7일 서울신문의 인터뷰에서)라고 말했다. 그는 또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나는 특히 한국의 민족적인 추상화를 개척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나는 동양화의 선(線), 한글이나 한자 서예의 선, 삶과 움직임에서 출발하여 공간 구성과의 조화로 나의 화풍을 발전시켰지요. 한국민의 민족성은 특이합니다.

즉 소박, 깨끗, 고상하면서 세련된 율동과 기백, 이같은 나의 민족관을 바탕으로 특히 유럽을 제어하는 기백을 표현하는 것이 나의 그림입니다.”(1988년 12월 5일 중앙일보의인터뷰에서) 유준상은 고암과 고암의 예술을 말하면서, “그는 예술의 사상가는 아니었다.

그의 예술관은 논리적 관련(論理的 關聯)으로 제시된 적은 한번도 없었으며, 다만 일하는 것으로서의 예술가였다. 일은 곧 그의 삶의 형식이었고, 이러한 형식을 통해 늘 생존의 조건을 신체적으로 감지하려는 게 그의 예술인 것이었다.”고하였다. 유준상의 이같은 지적을 대하면서 나는 나의 유년시절 아버지에게서 받았던 인상을 떠올렸다.

오직 성실 하나만으로 살으셨던 아버지, 고난한 환경 따윈 원망하지 않으시고 다만 땅을 파고 일구는 것, 자연에 순응하는 것으로서 생존의 형식을 드러내셨던 내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되살려본 것이다. 하기야 그것은 그 시절 대다수의 아버지들의 모습이었을 것이다. 어쨌든 구도의 길을 가는 성자처럼 그침 없이 작업함으로서 예술을 신체로 감지하고자 했고, 그것을 생존의 조건으로 여겼던 고암에게서 우리는 한편으로 서예가의 전형적인 모델을 발견하게 된다.

문자와 문장의 반복, 얼핏 단조롭기 그지없는 재료나 도구를 반복 사용하면서 예술의 경지를 감지해내고 일구어내는 것이 서예가의 길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유준상의 지적이 아니더라도 고암이 무념 무상의 상태에서 마치 단순 노동자의 일과처럼 작업한 모습을 그의 회화에서 찾아내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것을 찾아보는 것 또한 고암 회화의 서예미를 탐구하며 얻는 소득이자 의미라고 할 수있다.

여기서 나는 잠시 1989년 고암의 전시가 열렸던 호암갤러리(1. 10∼2. 26)에서 받은 느낌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고암의 작품들은 한마디로 나에게 충격 그 자체였다. 특히 몇몇 작품에 대한 생생한 기억 중 그 첫째 인상을 말하면 다음과 같다. 재료가 없었던 것일까, 아니면 재료 선택의 폭과 작가의 예술적 상상력은 극이 없음을 보여주려 한 것일까?! 잘게 쪼갠 장작개비가, 무수히 많은 장작개비가 100호 정도의 캔버스 위에 나를 향해 날아올 듯이 꽂혀 있었다. 장작개비의 행렬이 리듬을 타고 드러낸 것은 장엄함, 바로 장엄이었으며, 그것은 교향악의 절정처럼, 해일처럼 나를 덮쳐왔다.

제멋대로 쪼개진 나무결과 그 뾰족한 끝은 나의 시신경을 마구 찔러댔고, 그 전율은 10년도 더 지난 지금까지 내 뇌리에 칼금처럼 남아있다. 두 번째는 ‘군상’ 시리즈의 작품들이다. 군상 시리즈는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은 숫자의 사람이 제각기의 형상과 표정을 지니고 물결을 이루는가 하면 몇몇 사람의 형상이 얽히고 부대끼게 조형되어 있었다. 거기에서 새어 나오던 소리 없는 아우성, 그것은 분명 환청을 일으키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의 말대로 그것은 “1980년 5월의 광주”였고, “서울의 학생데모”였으며, “유럽사람들의 반핵운동”의 표현이었다.

이 ‘군상’ 시리즈 작품들이 주었던 감동 또한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나의 호흡을 가쁘게 하고있다. 흔히 서예 명가가 이루어지는 과정을 밝히는 말로 ‘옛 사람은 먹갈이로 벼루를 몇 개 구멍냈다더라’든가, ‘하루 이틀 집을 떠나는 일에도 문방사우를 지니고 가 하루라도 학습을 멈추지 않았다더라’고 한다. 어떤 상황에서도 진실을 향해 추호의 게으름이 없었음을 의미하는데 이와 같은 예를 고암에게서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고암이 프랑스로 옮겨 간 초기 시절을 유준상은 이렇게 들려준다. “고암은 어렵게 정한 하숙집에 짐을 풀자마자 호주머니에 뭉쳐 넣은 화선지를 펴놓고 주름진 종이결을 따라 붓을 놀렸다.

결코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경황이 아님에도 그는 손바닥으로 적당히 펴놓은 한 뼘 크기의 주름진 화선지 속으로 몰입해갔다.”라고. 주지하다시피 고암은 민족 분단으로 야기된 일련의 정치적 사건으로 인하여 1967년부터 1969년까지 약 3년 동안 대전교도소와 안양교도소에서 영어(囹圄)의 생활을 했다. 그는 훗날 “옥중에서 그림을 그리지 않았으면 아마도 미쳐버렸을 것입니다. 갖가지 화상(畵像)이 떠올라 머리가 터질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밖에서보다 더 많이 그렸습니다.”라고 그 시점을 회고했다.

고암은 감옥 안에서도 오직 예술 정신을 신체를 통해 감지해 내는 것을 ‘생존의 조건’으로 삼았던 것이다. 복역수들에게 지급되는 밥알을 으깨 모아 구조한 인체형, 목판화, 수묵화, 심지어는 농가에서 사용하는 짚으로 엮은 소쿠리에까지 표현 재료와 방법의 한계를 두지 않고 닥치는 대로 작품을 제작하였다. 이 때의 옥중 제작 작품만을 모아 별도의 전시회가 열리기도 했을 정도이니 그의 장인적 예술 정신과 노력이 가히짐작된다.

서예로서의 서예

작금 서예계의 일부에서 여러 가지 이유로 서예의 회화화 현상이 일고 있음을 주지하고 있다. 한편에서는 서예가 현대에 와서도 크게 구조 변형을 이루지 못했다는 평을 한다. 서예가 현대적 구조 변형을 이루지 못했다는 이유로 서구적인 신흥 예술이 될 수 없다는 얄팍한 평가를 내리기도 한다. 이러한 풍토 속에서 화랑가의 대접 또한 좋을 리가 없다. 전통을 지닌 현대 예술로서의 존재보다는 아직도 교양적인 존재로만 여기는 경향이 짙다. 이는 미술평론가들이 서예의 예술적 진정성 연구를 소홀히 했음을 들 수가 있다.

그러나 현대의 서예가들에게도 그 책임이 있다. 고전의 위대성에 의탁하는 것에서 벗어나 서예를 현대 예술로 확고히 자리잡게 하지 못했다는 평을 적극 부정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함부로 구조 변형을 운운할 수 없는 것이 서예이다. 오랜 전통을 지녔기 때문에, 늘 보아왔기 때문에, 문자나 문장을 표현하는 것이기 때문에 쉽게 파악했다고 결론 내릴 수 있는 것이 서예가 아니다. 현상으로 드러나지 않는 부분을 더 중시하는 것이 서예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암 회화의 서예화에 대해서는 앞다투어 예술적 평가를 가하면서도 정작 서예에 대해서는 깊이와 넓이를 살펴보려고 하지 않는데 문제가 있다고 하겠다. 서예가 서구적 신흥 예술이 되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고 화랑의 대접이 소홀하다고 해서 그들이 요구하는 대로 구조 변형을 이루어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꼭 변화의 당위성만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서예의 특성을 본질적으로 잘못 이해하고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애드 라인하트 식으로 바꾸어서 말하자면 ‘서예에 있어서 서예는 곧 서예이다. 서예의 종말도 서예로서의 서예이다. 서예의 종말은 종말이 아니다.’ 이기때문이다.

고암의 회화는 서예가 지닌 무한한 전개력을 지녔다는 것을, 또한 표현 예술의 근간이 됨을 동시에 증명하고 있다. 이는 서예가 서예이어야 할 당위성과 회화의 모티브가 되는 하나의 전형을 거울처럼 보여줌으로 인해서 서예를 서예다운 위치에 놓이게 했으며 서예를 모티브로 하여 회화를 하고자 하는 일련의 욕구들을 동시에 충족시키고 있기도 하다. 우리는 고암이 서예 정신을 지니고 서예 선과 문자 변형을 통해 일구어낸 그의 회화를 보면서 ‘서예로서의 서예’가 어떤 모습이어야 할 것인가 깊이 성찰해 보아야 한다. 이것이 고암의 회화가 서예가에게 제시하는 진정한 메시지일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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